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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ㅇ 2024. 3. 2. 01:51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나이가 됐다. 유치원에 들어가는 나이이기도 하다.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들, 좋은 친구의 엄마들을 만나 지난 7개월 많이 행복했고 또 성장했다. 정신과 상담받은지도 7개월이 지났다. 얼마나 어떻게 나아졌는진 모르겠지만 조금은 나를 이해하고 내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같다. 그 사이 규현이는 참 많이 컸다. 똑똑하고 밝고 귀여운 아이로 잘 성장하고 있다.

정든 페리반을 떠나 이제 슈슈반이다. 같은 원 내에서의 반/학년 이동이라 그래도 큰 틀에서 시스템은 동일하게 유지되니 적응이 조금은 덜 힘들기를 기대해본다.

페리반 담임샘을 못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아쉽다. 저 구구절절 긴 편지를 용기내서 전달했고, 그걸 읽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원에 대한 내용도 많아서 원장 선생님께도 보여드렸다고. 내가 저런 긴 편지를 왜 꼭 써야만 했고, 주어야만 했는지.. 정신과 주치의와 이야기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아마도 20대의 최정윤 님에게 하고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고.. 똑똑하고 열정적으로 일하지만, 적은 임금과 인정 속에서 지쳐가고 아파가던 20대의 최정윤. 그 말을 듣고 띵-하는 것 같았다. 맞는 말 같아서..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더 열심히 한다고 돈 더주지 않고, 대충한다고 돈 덜주지 않는다. 그런 좋은 분야도 있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일한 분야는 안그랬다.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열심히 안해도 월급은 나온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돈 받은 만큼만 일하는" 게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시대이다. 그렇지만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면 무언가가 남고,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한다.

큐레이터 일을 할때도 마찬가지다. 전시를 하게 되면 같이 일할 작가들, 재단, 미술관 등등과 소통을 한다. 내 의지로 기획을 하는 경우, 내가 원하는 일만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내가 싫은 일도 해야한다. 싫더라도 제대로 잘 하려면 일하는 과정에서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작가와 소통하고 또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쏟는다. 그렇게 더 열심히 한다해도 급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남는 것은 그렇게 뜨겁게 일한 작가와 나와의 관계, 혹은 그 전시를 세심하게 보아주어서 그 정성을 눈치채준 열성적인 관객, 혹은 그 전시를 리뷰해준 평론가/기자 정도 뿐이다.

유치원 교사도 마찬가지다. 매너리즘에 빠져 그냥 적당히 일해도 월급은 나올 것이다. 교과서대로 그냥 해야할 말들을 하고, 위험하지 않게, 책 잡힐일 없는 정도로. 내 사적인 삶과는 완전히 분리해서 널찍이 거리두고 영혼없이 일로만 대해도 솔직히 아무 문제는 없다. 오히려 그게 더 프로페셔널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오래 오래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그치만 페리반 담임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삶의 한가운데 아이들과 일을 놓고 열과 성을 다하여 아이들을 열렬하게 사랑했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규현이는 사랑해주셨던 것을, 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러 교사를 보아왔기도 했고, 여러 기관을 겪어보기도 했고, 전시하면서 내가 만났던 수많은 작가, 기관 관계자, 설치 운송 보험 담당자 등 여러 사람들 보면서 체득한 감 같은 것 있다. 그 열정이 너무도 말투 행동 표정 등에서 생생하게 느껴졌고,  규현이의 변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사랑의 씨앗과 물, 햇빛으로 피어난 결실은 긍정적인 변화라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좋은 전시를 만들고 나서 눈썰미가 뛰어난 동료 큐레이터에게 받는 피드백, 친절한 기자가 써준 멋진 리뷰, 무엇보다 함께 일한 작가에게서 받는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 는 돈을 더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지고 이 일을 계속 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난 그런 말들을 선생님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유치원 교사도 오래 하기는 힘든 직업일 수도 있으니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당연한 것 같고, 유아교육업체에서 프로그램 기획하는 사무직으로 이직을 한다니 조금은 아쉽지만, 담임샘 개인에게는 더 좋은 새로운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기쁘다.

어쩌면 그런 뜨거운 열정이 거리두기를 잘 하지 못하여서(?) 아이들과 지나치게 정이 들고 마음을 주어서 더 마음을 떼고 move on 하기 어려운 요소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교사라면 매년 겪어야할 일일테고..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또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이니까..

여튼 일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교사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의 인생의 한 챕터에서 규현이가 그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생각하니 그게 참 값지고 귀하고 감사하다.

졸업식 하루 전날은 내 생일이었다. 모든 학부모 생일에 그런걸 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규현이의 사진과 생일축하 문구를 적은 카드를 보내주었다. 규현이에게 엄마가 뭘 좋아하는 지를 묻고, 그걸로 카드를 꾸몄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좋아하는 게 햄버거와 스마트폰이고, 혼자 있는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아들 .. 팩폭 작렬..) 엄마가 젤 좋아하는건 규현이라 아빠랑 놀고 엄마는 혼자 방에서 쉬는거라고 했다고.... ㅠㅠ 갑자기 너무 민망해져서 규현이에게 아니라고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건 규현이고 규현이랑 같이 있는걸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어느새 네돌을 코 앞에 둔 나의 작은 아기는 이렇게나 많이 커서 촌철살인으로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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